2017.11.No.17

문학과 예술

계곡의 안개처럼 살다

계곡의 안개처럼 살다
- 양소유 (장흥중 30회, 재경장흥중고총동문회 부회장)


지난 4월 20일 무계(霧溪) 고영완(高永完) 선생의 일대기가 책으로 나왔다.

무계 선생은 해방 후, 고향에 장흥중학교를 설립시 답(畓) 100두락을 희사한다. 또한 장흥농업중학교를 설립했다. 황폐한 농촌의 부활을 꿈꿨다.
당시 부의 기준은 전답(田畓)이었다. 재산 3만평을 기부한다는 게 쉽지 않는 결정이다.
그는 대인(大人)이다.

장흥중학교 교정에는 이를 기리는 설립유공자 공적비가 세워져있다.


▲ 장흥중학교 건립유공기념비, 2007년 5월 건립.


일대기(一代記)

무계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의 15대 직계 종손이다. 구한말 항일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고광순은 그의 당숙이다. 의로운 집안의 DNA를 이어받았다.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학생과 일본 유학생이 중심이 된 항일결사조직 조선학생동지회 사건으로 여동생 고완남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고,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여동생 고완남도 오빠 및 남편과 함께 6개월간 복역하였다.

선생은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장흥지부장, 미 군정하 초대 장흥군수, 제25대 민의원(국회의원)을 지냈다. 항일독립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선생에게 말년은 매우 고독했다. 뜻을 이해해 줄만한 지기(知己)가 없었으며 대화를 나눌만한 벗도 없었다. 그래서 소주를 됫병채 가져다 두고 마시면서 오로지 글씨와 당시(唐詩)를 즐겨 음미했던 그는 1991년 향년 77세로 타계했다.


무계 고택(霧溪 古宅)과 송백정(松百井)

선생의 조부인 고재극이 장흥읍 평화리에 1852에 건축한 고택은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미터 높이의 축대에 들어선 5칸 짜리 목조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집 바깥 원림의 풍경은 매혹적이다. 소나무(松)와 백일홍(百)이 있는 연못(井)이라는 뜻의 ‘송백정(松百井)’은 200여년 전 처음 조성됐고, 무계 선생이 현재의 크기로 넓혔다고 한다. 연못 가운데로 길을 내고 섬처럼 꾸몄는데, 연못을 조성할 당시 심은 네 그루의 육중한 소나무가 연못의 역사를 말해준다. 연못 주변에는 수령 100년이 넘는 50여 그루의 배롱나무가 군락을 이루는데, 연못 주변과 연못 주변으로 난 길을 빼곡히 메우고 있다. 배롱나무에 꽃이 피면 선홍빛으로 물드는 장관을 연출한다.


▲ 송백정.

송백정에서 무계 고택으로 이어지는 짧은 숲길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데, 원시림의 녹음처럼 녹색 풍경을 가득 담고 있다. 담장 아래 둥치를 드러낸 아름드리 거목들이 늘어서 있어 바닥은 어둑하지만, 햇빛을 머금은 나뭇잎이 드리운 하늘은 온통 엷은 연초록색으로 빛나고 울창한 대나무 숲이 고택 주변을 감싸고 있다.

고택에 오르는 돌계단의 오른쪽 돌담 사이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나무 위로 다른 나무가 올라타듯이 서로 몸을 맞대고 있다고 해서 ‘사랑나무’라 부른다. 마치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다.


▲ 사랑나무(무계 고택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에서 바라본 풍경).

▲ 무계 고택.


가계(家系)

무계 선생의 여동생 고현남은 인촌 김성수의 맏아들 김상만(전 동아일보 회장)과 결혼하였고, 그 뒤로 여동생 고완남이 김성수의 넷째 아들 김상흠과 결혼하여 겹사돈이 되었다.

선생의 둘째 딸은 판사 이용훈과 결혼하였는데, 선생의 사위 이용훈은 나중에 대법원장이 되었다.


필자와의 인연

나의 조부님이신 운포(雲圃) 양재홍(梁在鴻) 선생(건국훈장 애국장)의 행적을 기록한 의적비(義蹟碑)와 일생을 시(詩)로 노래한 송가비(頌歌碑)가 향리인 화순의 월곡리(달마루골마을)에 있다.

1971년에 건립된 의적비 비문의 글씨(앞면 큰 글씨와 본문의 작은 글씨)를 무계 고영완 선생이 쓰셨다. 항일애국지사인 무계 선생이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광복단 전라도지단장인 나의 조부님 일대기를 붓으로 기록하신 것이다.

1988년 필자의 결혼식 때 무계 선생께 주례를 부탁하였으나 와병 중이어서 응낙하지 못하셨다.

2009년 8월 30일 필자는 고향방문길에 무계 고택을 들렀다. 당시에 미국에 거주 중이나 일시 귀국해 있던 무계 선생의 아드님인 고병선씨를 만날 수 있었다. 고씨는 그때 무계 선생의 일대기를 책으로 펴낼 생각을 갖고 있다고 얘기 했는데, 올해서야 비로소 책의 출간을 보게 되었다.


▲ 운포 양재홍 선생 의적비(사진의 우측).


▲ 필자의 무계 고택과 송백정 방문.


계곡의 안개처럼 살다

조선학생동지회의 거사는 실패했다.
1941년 7월 함경도책 이근갑이 경성의 윤주연(조직리더)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소지한 원산 상업학교 세포책이, 상경 기차의 검문에 걸려 체포 되면서 거사의 전모가 드러나고, 거사는 미완으로 끝난다. 1941년 9월에는 동지회 경성본부와 도쿄 유학생 본부가 일본경찰의 대대적인 검색으로 조직이 붕괴되고 와해됐다. 후에 이 사건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비화되어 많은 사람이 검거된다. 조선학생동지회 회원들은 검거되고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고영완은 여동생 고완남(인촌 김성수의 자부, 이화여전 재학 중)과 함께 검거되어(1941.9.) 1943년 3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고영완 부친 고동석 옹은 이 사건의 충격으로 사망했다. 조선학생동지회의 리더는 윤주연이었으며, 숨은 지도자는 고영완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학생동지회 약사」에는 고영완의 외가 장성 흥정에 있었던 논 300마지기를 담보로 은행에서 40만원을 융자 받았다는 사실이 기록된 것을 보면, 20억 상당(현재 기준)을 독립자금으로 지원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정부에서는 1982년에 고영완에게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위로했다. 해방 후 조선학생동지회 멤버는 여운형과 결별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고하 송진우편에 서게 된다. (<계곡의 안개처럼 살다>에서 인용)

9ㆍ28 수복으로 서울로 돌아온 선생은 가족들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종처남이 정읍군 인민군당위원장이던 고부면의 처갓집을 찾았다. 그곳에서 가족과 무사히 상봉한 고영완 의원은 정읍경찰서장에게 구치소에 구금 중인 부역자(附逆者)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거부하는 경찰서장에게 “내 가족이 지난 3개월 동안 무사한 것을 보면 저들은 공산당이 아닙니다.”고 설득했다. 그래도 완강히 거부하자 조병옥 내부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어서 위원장 1명을 제외한 모두(4, 50여 명)를 석방시킨 이야기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처럼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선생의 정치적 멘토였던 조병옥 박사의 “빈대 잡는다고 초가 삼 간을 불태워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 유산이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의 가슴에 울림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추천사에 갈음한다. (<계곡의 안개처럼 살다>의 제17대 국회의장 김원기 추천서문)


▲ <계곡의 안개처럼 살다>
한국판 쉰들러 리스트 무계 고영완 일대기. 반양장본. 고산지 지음 | 배문사 | 2017년 4월 20일 출간.

By 양소유(중30회, 본회 부회장)View 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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